냉장고 안의 삶



두통이 커진다 환상 44제

어느 순간부터 기분이 매우 나빠져 있었다. 편안한 의자에 앉아서 무료하게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뿐이었는데. 네모반듯한 모니터 안에서는 몹과 캐릭터와의 싸움이 막바지에 다다라 있었다. 내 캐릭터의 피는 거의 빠지지 않았고, 몹의 피는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잘 하고 있었다. 어디에도 문제는 없었다. 짜증나는 게임을 하면서 짜증내는 취미는 없다.
오만상을 찌푸리고 신경질적으로 키보드를 두들기다가, 머리가 아프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머리가 아파서 그랬구나. 나는 이제 왜 내가 짜증이 났는지 원인을 파악했다. 그런데 그래서 뭐? 원인 규명을 했지만 그 뿐이다. 새삼스럽게 두통약을 찾아 먹을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두통약이 있기나 했던가?
내 머리를 쪼는 딱따구리는 발작적으로 부드럽고 연한 뇌를 쪼아 대고 있었다. 지치지도 않는 모양으로, 나는 한동안 두통에 치를 떨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자고 일어나면 나을 거라는 소박한 믿음이 있었다.

더욱 심해진 두통에 눈물까지 흘리며 일어났을 때는 그 믿음이 산산조각 났지만. 이를 악물고 일어나 형광등을 켰다. 번쩍 번쩍하는 형광등의 빛이 눈을 찌를 때마다 두통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정신없이 서랍을 뒤져 두통약에 감기약까지, 비상시를 대비해 모아놓은 약을 모두 그러모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이때가 비상시가 아니면 대체 언제가 비상시인가. 먹고 나서 바로 효과가 오는 것은 아니라,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아픔에 울고 짜증내고 화내고 발버둥치면서 약기운이 돌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며칠째 비슷한 생활이 반복되었다. 시간 맞춰 약기운이 떨어질 때쯤이면 꼬박꼬박 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잠깐이라도 늦으면 두통이 날아들었다. 날이 갈수록 아픔은 더 심해졌다. 처음 이마를 두들기는 것으로 시작한 두통은 머리 앞뒤양옆을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두들겨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 군데를 두들기기 시작하면 다른 곳을 두들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말하자면 편두통이었다.

머릿속에 뇌가 아닌 무언가가 점점 들어차서 자기 크기만큼 뇌를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약을 먹고 아픔이 뽑혀나간 후에도 뇌가 압박당하는 것 같은 기분은 여전했다. 단지 아프지 않을 뿐이다. 뎅뎅 울리는 머리뼈의 울림. 이를 딱딱거려본다. 비슷한가. 모르겠다. 뽑혀나간 아픔 대신 졸음과 둔함이 밀려들어왔다. 졸음과 둔함은, 아픔보다는 매력적이다. 아름답다. 아, 졸려….

약이 없으면 신경줄이 바삭바삭 타버린다. 날선 도끼처럼 예리한 신경을 눅여주는 것은 약 뿐이다. 아, 이렇게 생각하니 무슨 중독자 같네. 하지만 약에 중독되지 않으면 미치는 것은 나다. 한 개로는 부족해서 두어 개씩 집어먹으면서도, 나는 두통약이 두통을 없애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퇴근길이었다. 슬슬 약기운이 빠져나가고 있어 머리가 욱신거렸다. 이마가 쪼개져 나갈 것 같아 머리를 움켜잡았다. 아파, 아, 파, 아파아파! 다리에 힘이 쭉 풀렸다. 제기랄. 낯선 벽. 낯설지 않은 두통. 두통. 두통. 구토가 밀려왔다.
무언가에게 벌컥 화를 낸다. 아파, 아프다고! 그만 없어져버려!

주저앉은 채로 가방을 뒤져 약을 꺼냈다. 네모난 곽 안의 알약을 뜯어내는데 이미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찢어질 듯 하면서 늘어나기만 하는 이 플라스틱. 머리 안을 헤젓고 다니는 망치. 아픔에 비례해 짜증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서 손이 벌벌벌 떨린다. 거칠게 알약 포장을 뜯다가 막 나온 하얀 알약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데굴데굴 굴러간다.
엉엉 울면서 두통약을 팽개쳤다. 억울하고 화가 나서 뭐라 할 수조차 없다. 왜 난 이렇게 아픈 건데? 이렇게 아프게 해봤자 얻는 게 뭐야? 짜증이 가슴을 가득 메우고 목구멍까지 왈칵왈칵 넘칠 때마다 눈구멍 아래의 눈물샘이 눌려 쿨럭쿨럭 물을 짜냈다.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머리를 다리 사이로 푹 수그렸다. 무릎으로 꽉 머리를 눌렀다. 머리뼈가 불룩거리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든다. 흐윽흐윽 하고 내쉬는 숨소리에 내가 숨이 막혀버릴 것 같다. 허공에 머리를 곧추세우니 미적지근한 바람의 느낌마저도 폭풍처럼 머리 안을 뒤흔들었다. 어쩌란 거야. 아직도 눈물샘은 마르지 않아 눈물이 찔찔 새어나오고 있었다.
눈을 꿈뻑거려 눈물을 떨구고 아까 내팽개친 두통약을 찾았다.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언제 저기까지 굴러간 거야? 싫다, 정말.
바닥에 떨어진 두통약을 거칠게 낚아챘다. 짜증에 눈이 멀어 제대로 보이지 않아 확 끌었더니, 손톱 밑에 뭔가가 들어간 것 같아 짜증이 또 울컥 치솟았다.

이 모든 악순환의 고리를 쥐어틀고 있는 건 머리에 매달린 두통이다. 너 때문이야. 또다시 울컥울컥 넘치는 짜증에 발을 동동 구르며 두통약을 싸고 있는 플라스틱 겉면을 좍 뜯어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모른다. 두통 때문이겠지.
두통약들이 모두 쏟아져 나왔다. 두 개쯤 아직 뜯겨지지 않은 포장지 안에 남아있었다. 더 벌려서 그 약까지 쏟아냈다. 손안으로 떨어진 것을 모두 움켜잡고, 목구멍으로 넘겼다. 물 없이 넘어가는 알약은 목구멍을 긁으며 내려갔다.
이마 앞쪽은 계속 욱신거리고 짜증과 고통을 생성해내고 있다. 어지간히 하고 시원해졌으면. 두통이 없는 일상이 언제쯤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손톱을 세워 꾹꾹 이마를 누른다. 통증이 형태를 갖추고 있다면 이 손톱에 눌려 뒈져버리라고 주문을 걸면서. 겉껍질을 아무리 눌러대도, 안의 무언가에는 손톱만큼도 영향이 없을 것이다.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짜증이 나고 너무나 아파서 제대로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단지 이 고통이 없어지기만 한다면….

쩡 하고 이마가 울렸다. 비명도 나오지 않을 만큼 아파서 입만 딱 벌리고 숨만 간신히 토했다. 정말로, 머리뼈가 울렸다. 눈앞에서 번쩍이는 어둠. 그러나 그 울림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비명도 못 지르고 벌레처럼 버르적거리고 있는 것을 몇몇 사람들은 슬슬 피해갔고, 몇몇 사람들은 안쓰러운 표정을 하고 쳐다보았다. 수명이 다 된 형광등처럼 깜빡깜빡 정신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반복했다. 한 아주머니가 내 어깨를 살짝 잡고 흔들며 괜찮아요, 하고 물어본 것은 머리가 울리고 난 직후였다. 거의 제정신이 아닌 나를 붙들고 있던 아주머니는 119를 불러야겠다고 내게서 손을 떼고 핸드폰을 꺼냈다.
사이를 두고 머리를 내리치는 아픔에 몸이 견뎌내지 못하고, 그대로 엎어졌다. 아주머니가 에그머니, 하고 손을 내미는 것이 느리게 보인다. 팔이 잡혀서 끌어당겨졌다. 그냥 넘어지는 거라면 나 역시 힘을 주고 아주머니의 손에 매달려 엎어지지 않을 수 있겠지만, 이미 내 신경은 너덜너덜해져 있어 매달리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잡힌 팔은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고 중력은 무겁다. 물 먹은 솜처럼 무겁고 수습할 수 없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머리를 바닥에 쾅 내리찍었다. 오히려 잡히지 않느니만 못했다.

세게 머리를 부딪친 듯 하지만, 별로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머릿속이 훨씬 더 아팠다. 주사기와 간호사 등등이 어렴풋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아주머니의 손이 우악스럽게 내 몸을 뒤집었다. 눈앞에 무언가 줄줄 흘러내렸다. 눈썹을 따라 옆으로 비껴나가는 물방울들, 눈썹이 막지 못하고 눈앞으로 뚝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들. 시야가 한순간 피막에 덮인 것처럼 붉게 물들었다.
에그야, 하고 피를 본 아주머니는 낮게 혀를 찼다.

그리고 찢어지는 비명.

무엇 때문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시선을 앞에 두고 있어도, 내 이마에서 튀어나온 붉은 피로 뒤덮인 부리는 시야 안에 있다. 부리가 살짝 벌어지며 그 안에 고여 있던 붉은 것들이 주르륵 흘러나온다. 내 고깃덩어리다.
눈을 위로 향하자, 부리가 달린 얼굴이 태연하게, 빠져나오기 위해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나와 눈을 마주치자 그 얼굴은 빤히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다가 부리를 다시 단단히 다물었다. 그리고 자신의 고개를 숙이고 부리로 내 상처를 헤집는다. 아니, 상처를 헤집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나올 구멍을 넓히는 거다.
까마득한 아픔에 정신을 잃어가면서 느낀 것은, 결국 내 이마 뼈를 바수다시피 하며 그것이 나와 버렸다는 것이다.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건.

덧글

  • 2008/05/08 19:34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TrueNine 2008/05/08 19:38 # 답글

    솔직히 매번 대단하다라는 말밖엔 할말이 없습니다.
    감탄에 또 감탄했습니다.
    또 배웁니다.
  • 희정 2008/05/08 21:52 # 답글

    ....처음에 읽을때 와.. 나랑 비슷해..라고 읽었습니다만.. (...)
    사실.. 종반빼고는 ..
    저 사람은 아직 서투네요. 아무리 머리가 빠개지듯이 아프고 괴롭고 미칠거 같아도 쓰러지거나 엎어지면 끝입니다. 아프다고 몸을 지키지 못하면 이미 삶에 대한 애착은 없는거죠. ..그런 면에서 저는 언제나 삶에 대한 애착은 최고조입니다.
    쓰러질때도 조금이라도 안전하게 쓰러지기 위한 몸부림을..
    순간 눈앞이 까맣게 변하더라도 주변에 뭐라도 붙잡고 그 감각을 어떻게든 이어보려고 한다던가.. 완전히 모든게 사라진듯한 순간이라도 육체는 그대로 유지시키기 위해 노력한다던가-온몸이 땅에 곤두박칠 치는 느낌일지라도 머리만은 보호한다던가..(..
    아아..뷰리풀 라이프..
  • 파김치 2008/05/09 13:33 # 답글

    *님// 무서운 일이지요! 사람 머리라는 게 참 이상한게, 꼭 달걀 같이 생겨서 이런 상상을 하게 만들거든요.

    TrueNine님// 에고, 감사합니다. 항상 칭찬해주셔서 몸둘바를 모르겠네요.

    희정님// 머리가 깨져나갈 정도가 되면 이미 제정신을 가지고 있는 게 무리일 것 같아서;
    삶에 대한 애착이 있다고 해도 갑자기 저렇게 되면 짜증 때문에라도 못할 것 같아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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