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안의 삶



뭐로 판단하는 타입이죠? 읽었습니다


「어머니는 지금, 가게에서 잠깐 빠져나오겠다고 하니까, 집 안이라도 둘러봐요. 안내할까요? 뭐로 판단하는 타입이죠?」
차를 따르면서 유이치가 말했다.
「뭘요?」
내가 그 푹신한 소파에 앉아 되묻자,
「집과 그 집에 사는 사람의 취향. 화장실을 보면 안다든지, 흔히 그런 말들 하잖아요」

요시모토 바나나, 키친, 민음사, p14~15



주인공 미카게는 부엌이었다. 허락을 받고 냉장고도 열어보고, 싱크대를 들여다 보기도 하면서 꼼꼼히 따져보는데, 몇 번 읽어 보면서 나도 '뭘로 판단하는 타입'인지 생각해봤다. 집과 그 집에서 사는 사람들의 취향을.

처음엔 유이치의 말대로 화장실이라고 생각했다.
깨끗한지 아닌지, 편하게 쓸 수 있는지 아닌지. 뭐 근데 여기저기 전전하다 보니까 난 화장실 수세식에 좌변기기만 하면 다 좋다.-_-;;;;;
몸을 돌려 움직일 수만 있으면 되고, 넉넉하게 휴지 있고, 손 씻을 수 있는 세면대, 세면대가 아니라면 적어도 세숫대야가 갖춰진 샤워기 겸용 수도꼭지도 좋다. 물기 닦을 수 있는 수건이나 종이 타올까지 있으면 금상첨화.


………요즘 세대에 좌변기 안 쓰는 집이 더 찾기 힘들지.
화장실에 타일이 깔려있지 않은 시멘트 그대로이거나, 휴지걸이를 따로 쓰지 않고 좌변기 위에 놓거나 하는 것도 물론 신경은 쓰이지만, 포인트가 높지 않다. 옛날에 우리 집도 그랬고 외할머니 집도 시골이라 푸세식이었는데 그것만큼은 싫어서. 특히 외할머니 집은 아예 대문을 나가서 산길을 좀 걸어야 화장실이 나왔기 때문에 진짜 화장실 가기 무서웠다. 하지만 혼자 밤길을 걷는 게 낫지 요강은 더 싫었고.-_-;
스스로도 화장실을 따로 꾸민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고 좌변기와 물과 휴지만 있으면 되니까 다른 사람이 꾸며놓는 것도 잘 모르겠고, 굳이 내가 알아챌 수 있는 취향이 있다면 휴지 무늬 정도일까? 요즘엔 삼겹 휴지로 무늬와 색도 다양하게 나오니까. 특이한 색, 예를 들면 홍차색의 휴지가 화장실에 있으면 신기하다고 할지, 웃기다고 해야 할지. 원피스 어느 SBS에서도 언급했던 것 같은데, 네, 뭐 그렇습니다.
깨끗함의 정도도 문제가 될 것 같지만 난 안경 안쓰면 내 방 더러운 것도 모르고 사는 인간.
하여간 그래서 별로 화장실은 아닌 듯 해서 다른 걸 생각해 보았다.

미카게처럼 부엌인가, 생각해 봐도 딱 오질 않고, 침실이라고 해도 보통 부모님과 함께 사니까 침실은 부모님의 공간이라고 생각해서 들여다 보는 것도 껄끄럽다.
그래서 별 거 없나, 그냥 집의 대략적인 분위기로 취향을 짐작하는 건가 하고 생각하기엔 뭔가 포인트는 있는 것 같고…






그러다가 생각났습니다. 맞다, 그게 있었지.


책장!!!!



생각해내자마자 딱 무릎치고 주먹 쥐었다. 그치, 이 중요한 포인트를 왜 잊고 있었단 말이냐! 집이라고 하니 화장실이라든지 부엌이라든지 하는 공간 위주로 생각하느라 잊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엔, 책장만큼 단적으로 취향을 보여주는 포인트가 없다.
일단 책장의 유무부터. 책장이 없는 집이 있긴 있어? 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있다. 학생이 있어 공부하는 책상에 교과서나 문제집, 그리고 기타 한두권쯤 올려놓는 게 다인 집이. 학생이 사라지고 직장인으로 변신 혹은 출가하면 그나마도 없어진다.
책장이 있다고 해도 책상에 딸려있는 책장인지, 아니면 따로 책장이 또 있는지, 장식장처럼 되어 있는 책장인지.
그리고 그 책장이 거실에 있는지, 개인의 방에 있는지, 부모님과 같이 쓰는지, 형제자매만 주로 쓰는 책장인지. 인형이나 기타 등등으로 책 앞에 장식을 하는지. 또 책장이 몇 개나 되는지. 꼭 책장의 갯수가 중요한 건 아니고 뭐라고 할까, 공간 대비 책(장)이 차지하는 비율?

이렇게만 봐도 꽤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의 취향이 보인다.
거기에 더해 책장에 꽂혀있는 책을 보면 확 온다. 무슨무슨 책이 있나 체크해 보는 것은 기본이요, 내가 좋아하는 책이나 장르의 책이 꽂혀있으면 낯선 집도 급 친근감이 든다. 우연히라도 나와 같은 책을 가지고 있으면 거기서 오는 동질감이란.
꿈과 희망을 가득 담아 말하듯, XXX를 좋아하는데 나쁜 사람일 리 없어! 이 XXX엔 별의별 게 다 들어갈 수 있지만 진리는 아님. 그렇더라도 일단 좋은 사람이구나, 하고 콩깍지가 쓰인다.

그리고 내가 아는 책이래봐야 얼마 되지 않고 상당히 장르가 편협하니까 베스트셀러, 그것도 러브코미디 뇌건조용 베스트셀러만 쭉 꽂혀있는 게 아니라면 오히려 재미있어 보이는 낯선 책 많은 책장도 반갑다.
그런 취향에 맞는 책장이 있으면 곧바로 내 집인 것 같고 편해져서 위화감도 안 느끼고 책장이 있는 주변에서 편하게 놀거나 잘 수 있다. 남의 집에 놀러가는 것 자체를 완전 불편해하는 사람도 있는데 난 책장이 취향이면 편해지더라.




미카게가 할머니와 아는 사이였다는 낯선 유이치의 초대를 받고 부엌을 살펴본 뒤에 살아도 좋다고 별 고민 없이 수락한 것처럼, 나 역시 낯선 사람의 초대를 받아 간다면 처음에야 경계해도 내 취향의 책장을 보는 순간 경계 해제! 가 되어버릴 것 같다. 거기에 진짜 원피스 전권이 있기만 해봐. 사랑해드리겠습니다.


덧글

  • 여람 2011/02/08 12:57 # 답글

    원피스만은 없습니다(눈물)
    사실, 없는 게 그것만은 아니지만요//ㅅ//
  • 파김치 2011/02/08 20:28 #

    여람님, 여람님께는 권교정님의 싸인북이 있으니까요! 원피스 상쇄!
  • 엘민 2011/02/08 16:20 # 답글

    원피스는 없지만, 파김치님이 제 집에 오신다면 아마 감동의 눈물을 흘리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ㅋㅋ 스눕이라는 책에 그런 내용이 있는데 책을 보면 성격같은 걸 알 수 있다고 하더라구요 ^^
  • 파김치 2011/02/08 20:30 #

    엘민님, 두근두근두근! 와, 전 그럼 당장 엘민 님을 좋아하게 될 것 같아요+ㅅ+
    남의 책장이란 어쩜 그리 보고인지!
  • 새벽 2011/02/08 18:17 # 답글

    아하하 저희집에 올러 오실래요?ㅎㅎ 저번에도 말씀드렸다 싶이 원피스, 강철의 연금술사, 크게 휘두르며 다 갖추어 두었습니다ㅎㅎㅎㅎ 사실 원피스는 헌책으로 샀다가 헌책으로만 보는게 너무 아쉬워서 새책으로 죄다 질렀지요(..) 그래서 원피스만 2질(..) 이걸 어쩐다;;
  • 파김치 2011/02/08 20:31 #

    새벽님, 놀, 놀러가고 싶습니다! 저도 강철, 크게 휘두르며, 원피스 다 있고 다 좋아하니까, 그 외에 새벽님의 책장엔 또 뭐가 있을 지 소녀의 방심이 두근닥 콩닥콩닥. 분명히 저 셋만큼 굉장한 책들이겠지요+ㅁ+
  • 고물 2011/02/10 22:54 # 답글

    스크롤을 내리면서 저도 생각해봤는데, 모니터 밑에서 책장이라는 글씨가 나타나는 순간 아하! 싶었습니다. 제 나름의 꿈의 책장이 있는데, 그걸 갖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정말 기쁠 것 같아요.
  • 파김치 2011/02/11 17:58 #

    고물님, 그쵸! 제겐 무슨 책이 있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두고, 어떻게 그 가족하고 교류하고 있는지도 상당히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러면서 책장이 살아있는 생명처럼 순환하고…!
    동감해 주신다니 기뻐요~
  • 히카리 2011/02/11 01:09 # 답글

    안방 책장엔 음식관련 만화책(심야식당, 코알랄라, 에키벤, 사랑이 없어도 먹고 살수 있습니다 외 요시나가 후미 만화)이 있고, 손님방엔 얌전한 책이 있고ㅜㅜ 창고(,,,)엔 완벽 취향인 책들이 박스채로 있는 나는 뭥미;

    좋아하는 책을 책장에 가지런히 정리할수 있는 환경이 부럽다;ㅁ;
  • 파김치 2011/02/11 18:00 #

    히카리 언니, 안방엔 왜 온통 음식 관련이야!ㅋㅋㅋㅋㅋ 분류가 너무 확실해서 웃었다.
    창고에서 취향인 책들을 풀어서 마음껏 자랑하고, 예뻐해 줘요! 물론 손님에 따라 조금 가려서 보여줘야 하는 환경이긴 하겠다.; 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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