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안의 삶



번역의 중요함을 깨닫다 읽었습니다

달려라 메로스달려라 메로스 - 2점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욱송 옮김/도서출판 숲





다자이 오사무에게 급 호감이 가서「달려라 메로스」, 단편집을 샀습니다.
'달려라 메로스'는 일본 중학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고, 같은 단편집 내의 '동경 팔경', '여학생' 등도 다자이 오사무를 알려주는 유명한 단편. 유명하다고 하지만 사실 인간실격 외에 모르니까, 알려고 산 거지만.
'인간실격'과 그 책에 같이 실려 있던 '직소'로 다자이 오사무에 대한 평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기 때문에 다른 단편들도 완전 기대하고 봤는데… 더럽게 재미없습니다. 보다 하품 나옴. 지루해서 몸을 배배 꼬면서 간신히 읽었습니다.

깨알 같은 포인트는 있죠.
'후지 산 백경'에서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강 쯤은 건너야지 않겠냐는 대화를 하다가


"……아, 한 사람 생각났다! 일본에도 용감한 녀석이 하나 있군. 그 녀석은 정말 굉장해. 누군지 알겠나?"
"그게 누군데요?"
청년들도 눈을 반짝였다.
"키요히메[淸姬 : 일본에 전해지는 전설의 주인공. 젊은 승려 안친을 연모했던 키요히메가 커다란 뱀으로 변신해 그를 쫓아가 종(鐘)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안친을 태워 죽인다는 이야기]. 안친을 쫓아서 히다카가와 강을 건넜지. 열나게 헤엄쳐서 말이야. 정말 대단하지 않아? 어떤 책을 보니 그때 키요히메는 겨우 열네 살이었다고 나오더군."

다자이 오사무, 달려라 메로스 中 후지 산 백경, 숲, p131


하는 식으로 스스로도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말하지만, 애초에 서로의 운명만 탓할 게 아니라 맨몸으로 수영할 각오로 강을 건너서라도 만나는 진취적인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저런 스토리의 키요히메를 떠올릴 수 있다는 게 다자이 오사무 답다고. 이 부분에서 픽픽 웃었습니다.
또 같은 단편에서 후지 산의 인상이 부처님 상이면 안된다느니 하는, 보통 사람이라면 안도할 풍경을 싫어하는 모습 등 진짜 깨알 같은 포인트는 있는데, 진짜 그 뿐이에요.
전반적으로 어딘가 늘어져있습니다.
이런 게 아닌데. 인간실격을 읽으면서 기대했던 게 이런 게 아닌데?-_-; 인간실격 읽으면서 이야, 이래서 다들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운운 하는구나 깨달았고만 그리고 바로 끝이야?
그런 실망을 감추지 못했지만, 곧 철회.




아아! 불쌍한 당신을 어떻게 벌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언제나 온화하고 올바르며 언제나 가난한 자들의 편이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빛을 발하듯 아름다웠습니다. 당신은 틀림없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저는 그것을 알면서도 요 이삼 일 동안 당신을 팔아넘기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내가 어쩌다 당신을 팔아 넘긴다는 못된 생각을 했던 걸까요. 안심하세요. 이제부터는 오백 명의 관리와 천 명의 병사가 온다 해도 당신 몸에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몹시 위험합니다. 당신을 노리는 자들이 있으니 지금 당장 여기서 도망쳐야 해요. 베드로, 야고보, 요한 그리고 너희 모두 날 따라와라. 온화하신 우리 주를 지키며 평생을 같이 살자. 입 밖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마음 속에서 사랑의 맹세가 우러나와 가슴이 다시 뜨겁게 끓어올랐습니다.

다자이 오사무, 달려라 메로스 中 유다의 고백, 숲, p106


오오, 불쌍한 분. 당신을 처벌받게 할 수는 없어. 당신은 늘 다정했어. 당신은 언제나 올발랐어. 당신은 언제나 가난한 자의 편이었어. 그리고 당신은 언제나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어. 당신은 진정한 하느님의 자식입니다. 저는 그걸 알고 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당신을 팔아넘기려고 이삼일 동안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당신을 팔다니, 내가 어쩌다 그렇게 엉뚱한 생각을 했던 것일까요. 안심하십시오. 이제는 관리 오백 명, 군인 천 명이 오더라도 당신 몸에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당신은 지금 쫓기고 계십니다. 위험합니다. 지금 곧바로 여기에서 도망칩시다. 베드로도 오고 야고보도 오고 요한도 와요. 모두 와서 우리의 이 다정한 주(主)를 지키고 평생 오래오래 살아가자, 라고 마음속으로부터 사랑의 말이, 말을 한 건 아니었지만 가슴속에서 들끓었습니다.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中 직소, 민음사, p156



같은 단편입니다.
「달려라 메로스」에 나오는 '유다의 고백'은 먼저 가지고 있던 「인간실격」 말미에 실려있는 '직소'와 같은 단편이라 휙 넘겼거등요.
그리고 단편집 끝까지 너무 재미없어서 눈물 뽑아내며 보다가 그래, 알고 있던 직소라도 보고 기분 전환 하자, 하고 봤는데, 보고 나서야 왜 이 단편집이 존나게 재미없었는지 알았습니다.
번역으로 똑같은 단편이 이렇게 다르게 읽히다니!

단어의 뜻, 문장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은 거의 같아요.
그러나 '유다의 고백'은 한 문장 한 문장 말 그대로 써내려간 느낌입니다. 유다가 예수를 팔아넘기기 위해 제사장 중 누군가에게 달려가, 사랑과 질투에 마음을 태우며 자신이 늘어놓는 말에 자신이 취해 묻지 않은 이야기까지 횡설수설 고해 바치는 격렬한 감정의 고저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미 그런 감정을 모두 쏟아내 한 템포 지난 뒤에 쓴 것처럼 차분하고 부드러워요.
'직소'에서는 문단 나눔도 없이 쉴새 없이 쏟아내는 말 안에 예수를 향한 열렬하고 비뚤어진 사모의 마음이 생생하게 느껴지고, 그 사모로 인해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유다가 보였는데 말입니다.


전체적으로 「달려라 메로스」의 단편 모두가 어떻게 말해야 할 지는 모르겠는데, 또박또박 번역되어 있어요.
1인칭 시점이라 상당히 여성스럽고 읽는 독자에게 호소하는 듯 독백하는 부분이 많은데, 그걸 또박또박 번역하니 좋게 말하면 템포가 느리고 차분합니다. 까놓고 말하면 굼벵이처럼 늘어져 있고 한없이 자학적이고 비뚤어진 세계관의 다자이 오사무 스타일을 상당히 희석시켜 민숭맹숭해 독특한 맛이 없어요. 이건 번역가의 탓.

기상천외하고 흡인력 있는 스토리로 거지 같은 다이제스트 판으로 읽어도 재미있는 작품이 분명히 있을 테지만, 다자이 오사무가 그런 작품을 내놓는 작가는 아니고 자신의 스타일을 확고하게 가진 작가라고 생각하는데, 적어도 이 단편집에선 다자이 오사무의 스타일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아니면 민음사 번역이 신급이라 있지도 않은 다자이 오사무의 스타일을 만들어내 독자에게 감동을 줬거나.-_-;



http://pakimchi.egloos.com2011-02-10T08:23:220.3210

덧글

  • greenmovie 2011/02/10 17:57 # 답글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을 읽은 적은 없지만 두 편의 예를 보니 정말 다르네요. 분위기가 완전 달라져서 여러 번 읽어봤어요. 역시 번역의 힘이란...
  • 파김치 2011/02/10 21:13 #

    greenmovie님, 직소가 상당히 짧은 단편이지만 두 번역이 너무 달라서 다른 소설 같아요.
  • 여람 2011/02/10 19:08 # 답글

    번역의 힘이란...(2)

    제게는 키요히메의 괄호 속 설명이 너무 강렬하여 강을 건너고 자시고 하는 건 뒷전으로 미뤄졌습니다.
    근데 저게 14살이란 말인가!!! 실로 두렵습니다, 중학생들(...)
  • 파김치 2011/02/10 21:15 #

    여람님, 키요히메에서 놀라셨군요! 하지만 저도 뭐야 저 무서운 여자는… 하면서 검색해본 결과로는 키요히메의 나이는 저렇게 아이에서 미망인에서 다양한 것 같아요. 14살까지 나잇수가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하다고 할지!
  • 엘민 2011/02/10 19:34 # 답글

    번역이 참 오묘하지요. 저는 민음사 번역을 훨씬 맛깔나게 읽었어요. 한국어를 잘해야하고, 저자의 문체도 잘 살려야하고, 번역도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 파김치 2011/02/10 21:16 #

    엘민님, 저도 민음사 쪽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숲에서는 너무 잔잔하고 평온해서.
    번역이 제 2의 창작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닌 듯해요. 그전까진 비교해 볼 기회가 없어서 몰랐는데 정말 뼈에 닿도록 깨우쳤습니다.
  • 유자차 2011/02/10 22:07 # 답글

    괜히 번역에 따라 작품이 달라진다는 말이 있는게 아니죠. 더 세세하게 보시는 분들은 작가도 작가지만 역자에 따라 판본 고르시더라구요.

    저도 제일 즐겁게 본 건 인간실격이고 그 다음은 달려라 메로스 > 동경팔경 정도에요. 아직 다 본 건 아니지만....ㅠ_ㅠ

    근데 인간실격 너무너무 좋지 않나요? 이렇게 파고파고 파고 들어가도 끝이 안보이는 듯한 어둠은 처음인거 같아요.... 완전....ㅠ
  • 파김치 2011/02/11 17:50 #

    유자차님, 한국 소설보단 외국 소설을 더 많이 보는 편이지만 이렇게 역자가 다양한 책을 찾아본 건 거의 드물어서 비교해 볼 일이 없었는데, 신기합니다.
    저도 제일 숨막히게 읽었던 게 인간실격이에요! 그 다음은 물론 직소. 비등비등할 정도로 좋아해요. 인간 실격을 읽고 나서 동경 팔경을 읽으니 역시 다자이 오사무에서 자전적인 요소를 빼고 읽는 것이 불가능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더군요.
    달려라 메로스나 다른 단편들도 다른 번역서를 찾아 다시 읽어보고 싶어요…!
  • 칼슈레이 2011/02/10 22:58 # 답글

    번역 정말 중요하네요 ㅎㅎ
  • 파김치 2011/02/11 17:50 #

    칼슈레이님, 상당히 분위기가 달라졌죠! 중요해요, 번역!
  • 양종욱 2011/05/26 23:04 # 삭제 답글

    안녕하세요.

    양손프로젝트라는 연극팀의 양종욱입니다.

    이번에 다자이 오사무의 단편소설을 가지고
    다자이 오사무 단편선 <개는 맹수다> 라는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단편인 <황금풍경><축견담><직소> 세 작품을 가지고 작업을 했습니다.
    다자이 오사무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공연을 보신다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직소>를 인상깊게 읽으신것 같아서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다행히 저희는 민음사 번역본을 사용하여 공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꼭 보러와주세요
    감사합니다

    http://www.shortstory.kr

    http://blog.naver.com/yangsonp
  • 파김치 2011/05/27 19:19 #

    양종욱님, 유명하다고 생각하지만 연극으로 오르기 쉽지 않을까 했는데 연극이라니 궁금해지네요.
    유익한 정보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 꼬비에뚜 2012/04/17 22:37 # 삭제 답글

    (위 연극을 보았으면 좋았을 것을,,,)
    번역에 대한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취지에는 전적으로 찬성합니다.
    말씀하신대로 작가의 문체와 정서를 살려 유연하게 번역하는 것은 보통 능력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의미전달 자체도 몰이해, 왜곡시키는 번역물의 현실을 볼 때
    너무 과분한 것을 요구하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네이버에서 소통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쉽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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