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안의 삶



그대, 밤에 걷지 말지어다 읽었습니다


밤 산책 - 8점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시공사





여러모로 속았다! 고 생각하게 된 책.


요코미조 세이시 특유의 가계도는 여전합니다. 우산의 살이 하나 떨어져 나간 것처럼, 얼핏 정상인 듯 보여도 조금만 들여다보고 있어도 알 수 있는 음산하리만큼 비틀린 인물들이 면면히, 썩은 물에 고인 듯 한 핏줄로 이어져 있습니다.
요코미조 월드에서는 대체로 광풍처럼 휘몰아치는 살의가 나오기보단, 폐쇄적인 환경에서 끈적끈적하고 축축한, 기묘하고 기분 나쁜 살의가 조여오는 그런 분위기인데, 『밤 산책』 역시 배경이 섬이라거나 하는 실질적인 밀실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여러모로 다른 평범한 세계와의 교류는 닫혀 있어 역시 그런 분위기가 풍겼습니다.

일인칭의 시점에서 쓰여진 『밤 산책』은 삼류 추리 소설가인 나, 야시로 도라타가 쓴 것으로, 도라타는 악우인 센코쿠 나오타의 횡설수설로 시작된 요청을 받아 후루가미 가문에 초청 받아 가게 됩니다. 그곳에는 꼽추 화가 하치야가 후루가미 가(家)의 외동딸 야치요의 정혼자 자격으로 머물고 있었는데, 그는 다음날 머리가 없는 시체로 발견됩니다. 우연하게도 하치야와 비슷한 용모를 한 야치요의 오빠, 모리에가 사라지고, 그날 밤 몽유병 증세를 보였던 야치요 역시 의심 받기 싫다는 쪽지를 남긴 채 모습을 감춥니다.
<알라딘 밤 산책 소개 글에서 옮겼습니다>
'악우'라 표현했지만 나오타 역시 사람의 화를 돋우는 말을 하며 주인공을 개나 고양이처럼 대하며 종처럼 부리곤 합니다. 주인공 도라타 역시 나오타의 그런 성격을 싫어하고는 있지만 물질적인 후원에 드러내놓고 거부하지 않는 등, 역시 정상적인 관계는 아닙니다.
특히 모리에는 참 여러모로 인상에 남는 캐릭터였어요. 그다지 많이 나오진 않지만, 그런 몸이기 때문인가 싶어서 안타까운가 하면, 음습한 집착엔 진절머리 나고, 그렇다고 마음껏 미워하자니 그렇지만 한 군데 정도는 좋아할 점이 남아있는 그런 애매한 인물…. 쓸데없이 순애적인데.

요코미조 세이시 특유의 몽환적이고 일그러졌으며 좁은 세계, 의도를 알 수 없는 범인의 행동에 전율하는 사람들… 여기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습니다.

또, 『팔묘촌』에서와 마찬가지로, 1인칭 시점에서 쓰였기 때문에 시리즈 물의 주인공 격이더라도 긴다이치에 대한 이야기는 그다지 없어요.
일단 주인공들은 긴다이치를 별 볼 일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며 무시한 다음에-_-; 은근히 여기저기 얼굴을 들이미는 긴다이치에게 불쾌감을 품고, 경찰들에게 오오 선생님~ 하며 떠받들어지는 광경을 어이 없다는 듯 바라보고… 하지만 마지막엔 결국 긴다이치의 진가를 깨닫게 되죠.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 마지막 한 챕터에서.
일부러 탐정, 그것도 이 오묘하고 악마 같은 사건을 척 풀어내는 긴다이치가 마치 신처럼 보이게 되는 것을 경계하는 것처럼요. 3인칭인 시점에서는 긴다이치가 생각하고 헛다리 짚는 부분도 쓸 수 있지만 1인칭에서는 오로지 긴다이치가 이제 생각을 끝낸 후의 행동밖에 쓸 수 없기 때문에 더 그런 듯합니다. 명탐정이라고 해도 신이 아니니까요.

아무래도 같은 1인칭 시점에, 긴다이치가 아닌 다른 인물이 이야기를 이끌어 가며 사건에 대한 '후기'를 남겨 사건을 전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팔묘촌』을 떠올렸지만 팔묘촌과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면 바로







긴다이치 코스케가 범인을 잡았다는 점♪




세상에! 긴다이치 코스케가 범인을 잡았어?
자살 방조 & 살인의 목적을 달성한 후에나 '사실 이렇습니다만~'하던 게 긴다이치 아니었나요?!
어떻게 말하면 범인의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막았어요! 『팔묘촌』에서 범인이 죽은 후에야 '사실 이 사람이 범인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운운하는 긴다이치는 진짜 짜증났거든요. 설마 여기서도 나중에 긴다이치가 그러는 거 아니야, 하고 잠시 의심했지만 다행히도 잡았어요, 범인!
범인의 정체에도 놀랐지만, 이런 부분에서도 상당히 놀랐습니다.(…)



중요한 트릭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하지만, 소소한 트릭은 대체로 발상의 전환, 화자에게(다시 말하면 요코미조의 의도대로) 끌려가지 않고 배치된 작은 힌트들로 채워나가면 되지 않을까 싶네요. 하지만 진짜 중요한 트릭이…… 중요한 트릭을 알지 못하면 모든 추리가 막히는 셈이라, 공정하지 못해요!
공정하지 못하니 어떤 의미로는 제대로 된 '추리' 소설은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만, 그래도 요코미조 세이시의 이름값은 하는, 그리고 긴다이치 코스케의 활약(이 부분에 밑줄 쫙)을 보고 싶다면 추천. 범인과 기타 등등을 모두 죽게 내버려 둬야 나의 긴다이치지!(?) 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이건 피해야 하겠지요.


덧글

  • 산왕 2011/04/28 23:04 # 답글

    분위기는 맘에 드는데 추리요소는 역시나인 책이었죠^^;
  • 파김치 2011/04/29 18:01 #

    산왕님, 역시나가 아니라 이런 독자를 우롱하는 추리 소설이 어디있어? 하고 놀랄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역시 추리 소설이라는 점을 접어놓으면, 재미있는 점이 없는 것도 아니고.....
  • 遊異 2011/04/29 00:50 # 답글

    정말 쇼킹하네요!! 팔묘촌 보고 뭐 이런 @$^*& 같은 놈이 다 있어!!싶어서 이 시리즈를 안 보게 됐는데, 범인을 잡았다고 하니 놀랍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보고 싶은 생각은 안 드네요;; 그냥 전 이 시리즈가 안 맞았나봐요. -.-;;
  • 파김치 2011/04/29 18:02 #

    遊異님, 요코미조 세이시 특유의 요사스러운 분위기가 있어서, 거기에 안 맞으면 힘들죠.
    저도 하필이면 팔묘촌을 긴다이치 시리즈 중에서 제일 먼저 본 바람에 긴다이치 의심증에 걸렸었습니다. 제일 나빴어요, 팔묘촌이.
  • 여람 2011/04/29 06:55 # 답글

    그래서 전일이가 할아버지의 명예를 걸고 범인들을 줄줄이 저 세상으로 배웅해준 거였군요...!
    모든 것이 납득되었습니다OTL
  • 파김치 2011/04/29 18:05 #

    여람님, 이제와 생각하면 긴다이치 소년은 여러모로 대단한 뻥인 듯… 그렇다고 해도 만화인 만큼 좀 속시원한 점이 없잖아 있어요, 전일이는.

    그리고 또! 제가 여람님의 온을 인질로 잡는 것처럼 저도 인질을 보내드려야..! 뭐가 좋을까요? 기생수라든가 바람의 저편이라든가 비밀이라든가 춤추는 족제비라든가..!<여기까지 보이는대로 쓰고보니 다 만화책이네요...하, 하.....ㅠㅠㅠㅠ)
  • 여람 2011/04/29 21:39 #

    인질의 조건은 부피 적고 무게 가벼울 것(쩜쩜쩜)
    온은 겨우 3권 밖에 안된단 말예요;ㅂ;
    하지만 인질리스트의 아이들은 왠지 권수가 꽤 될 것 같은 느낌이..//ㅅ//
  • 파김치 2011/04/29 22:27 #

    여람님, 감질나게 7권 완결인데 3권까지만 가져간다거나! 두 번 이상의 만남을 예고하는 절단 신공이군요. 후후후.
    무게가 가벼울만한 건 그나마 춤추는 족제비지만 그건 저도 완결을 못 가지고 있고 그나마 또 6권이라 애매하네요~ 책이라면 한 권 완결이라 좋지만 과연 여람님 마음에 들 책을 제가 가지고 있을 것인지..!
  • 엘민 2011/04/29 12:01 # 답글

    긴다이치가 제가 생각하는 그 긴다이치는 아니겠죠;; 아무튼 왠지 끈적한 느낌을 주는 소설같아요.
  • 파김치 2011/04/29 18:08 #

    엘민님, 실제로 이 시리즈가 끈적끈적하고 기이하고 등골이 근지러운 시리즈입니다. 으으으, 보고나면 항상한동안은 사람의 악의에 대해서 괴로워져요.
    긴다이치가 아마 엘민님이 생각하시는 그 긴다이치 소년이라면 맞고요! 그 소년이 항상 외치던 할아버님이 바로 이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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