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안의 삶



시간은 항상 성실히 흘러가지 읽었습니다


회귀천 정사 - 8점
렌조 미키히코 지음, 정미영 옮김/시공사


살인과 꽃,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의 소재가 맞물린 아름다운 추리 소설. 문장 하나하나 다 아름답고 또 교묘하게 쓰여 있어서 피비린내조차 꽃향기로 느껴지는, 그런 아름다움.

개중에서도 제일 인상 깊었던 것은 도라지꽃 피는 집이었어요. 사이코패스라는 단어가 한창 유행했을 당시에는 사이코패스를 알아보는 테스트, 그 전엔 FBI에서 살인자에게만 해보는 테스트라며 괴담에 가까운 테스트가 있는데, 이 이야기와 겹쳐보였어요. 애잔하면서도 무서운.





솔라리스 (반양장) - 10점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김상훈 옮김, 이부록 그림/오멜라스(웅진)


「세상이 끝날 때까지 100억년」을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러시아를 포함한 동유럽권에서의 SF는 스페이스 오페라나 우주를 배경으로 한 영웅 소설의 말초적인 즐거움을 추구하기보단 거대하고 실험적인 사변 문학 쪽에 가까워 보여요.
하드하지 않고, 엄밀히 말하면 지금과 다를 바 없는 주변(배경이 낯설 수도 있지만), 그런 일상적인 풍경에서 SF의 가장 중요한 테마인 인간과 다른 지성과의 첫번째 접촉.


행성 솔라리스 전체를 에워싼 원형질의 ‘생각하는 바다’는 인류의 거듭된 접촉 시도에도 불구하고 130년이 지나도록 반응다운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며, 한때는 수많은 연구자들을 끌어들이며 융성했던 솔라리스학(學)도 지금은 쇠퇴기를 맞이했다. 심리학자 크리스 켈빈은 솔라리스 상공에 떠 있는 연구 스테이션으로 부임해 온다. 솔라리스에 도착하자마자 켈빈은 동료이자 선배 학자인 기바리안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지만, 그보다 한층 더 켈빈을 당혹스럽게 한 것은 남은 연구원 두 사람이 그를 대할 때 보이는 불가해한 행동이다. 그러나 켈빈은 곧 그 이유를 깨닫는다. 오래 전에 자살한 아내 레야를 빼닮은 ‘방문자’가 그의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가 기억하는 레야의 완벽한 복제처럼 보이는 ‘그녀’앞에서 켈빈은 엄청난 감정적 갈등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라고 알라딘에선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초반은 이해할 수 없는 동료들의 행동이며 말로 지루하기까지 했는데-_-; 읽어가면 읽어갈수록 그 초반의 일들, 묘사가 이해되기 시작하면서 단숨에 읽었습니다. 반전 소설과는 다른 의미에서 한 번 더 처음부터 읽게 되네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 10점
오스카 와일드 지음, 이선주 옮김/황금가지


아, 오스카 와일드…!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합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헨리부인. 전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은, 아니 최소한 좋은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은 말을 하지 않아요. 그러나 나쁜 음악이라면, 대화 속에 그 음악을 묻어 버리는 게 우리의 의무겠지요."
"아! 그건 해리의 생각이에요. 안 그런가요, 그레이 씨? 전 항상 해리의 생각을 그의 친구들에게서 듣곤 합니다. 해리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게 되는 게 항상 그렇게 해서지요. (...)"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오스카 와일드, 황금가지, P73



"해리, 자네가 한 말의 단 한마디도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지. 그 사실을 자네도 알아. 도리언 그레이의 삶이 파멸한다면 그 누구보다 유감스러워할 사람은 바로 자네야. 자네는 겉으로 그런 척하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사람이니까."
헨리 경은 웃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여기길 즐기는 이유는, 우리 자신을 생각할 때 두렵기 때문일세. 낙천주의의 근거는 절절한 공포감이야. 우리가 인간의 본성이 관대하다고 믿는 건, 이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미덕을 소유했다고 믿고 싶기 때문이야. 잔액보다 큰 액수를 인출할지도 모를 때 우리는 은행 직원을 칭찬하고, 혹시 나는 털지 않겠지 하는 희망에 노상 강도에게서도 좋은 면을 찾아낸다네. 내가 했던 말은 모두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네. 나는 낙천주의를 그 이상 경멸할 수 없어.(...)"
p115~116



사회라는 것, 최소한 문명사회라는 곳은 부유하며 동시에 매력적인 사람들을 향한 추문을 결코 믿지 않으려 한다. 문명사회는 도덕보다 더 중요한 게 매너라고 본능적으로 느끼며 가장 고상한 윤리와 도덕을 갖추는 것보다는 빼어난 요리사를 데리고 있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여긴다. 형편없는 만찬을 대접했다가, 또는 형편없는 포도주를 내놓았다가, 그래도 그 사람이 사생활에 오점 하나 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 건 어쨌거나 별 위안이 되지 않는다. 이 주제를 놓고 벌어졌던 토론에서 헨리 경이 한때 했던 말대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미덕이라 해도 그것이 반쯤 식은 앙트레가 끼친 해악을 보상할 수는 없다. (...) 진실치 못함이라는 것이 그토록 끔찍한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진실치 못한 태도는, 우리가 그것에 기대어 우리의 인격을 여러 개의 것으로 창조할 수 있는 수단이다.
어쨌거나 바로 저것이 도리언 그레이의 생각이었다. 인간의 자아를 단순한 무엇, 영원하고 변함없으며 단 하나의 본질을 갖고 있는 무엇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천박한 심리학에 도리언 그레이는 경이로움을 느끼곤 했다. 그에게 인간이란 수많은 삶과 수많은 감각, 복잡한 여러 개의 형태를 가진 존재, 그 안에 여러 기이한 생각과 열정의 유산을 지니고 있으며, 그 육체부터가 죽음이 거느리는 괴물 같은 질병의 오점과 떼어내 생각할 수 없는 존재였다.
P206~207



결론 : 친구는 가려서 사귑시다.
바질 핼워드의 순수하고 깨끗한 천사였던 도리언 그레이가 어떻게 헨리 경에게 빠져들어 스스로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타락해가는지-_-;
헨리 경에 따르면 바질 핼워드는 형편없이 지루하고 재미없는 사람일지는 몰라도, 그러한 악평을 헨리 따위에게 들어야 할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양심이라거나 성실함 등을 상징하던 사람이었어요.
그러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그린 이후, 즉 도리언이 헨리 경에게 만났을 때부터 바질은 예술의 모티프가 되던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도리언 그레이를 잃어버렸습니다. 역시 이 부분도 헨리 경의 말에 따르면 "그의 작품은 현저히 격이 떨어졌다고. 내가 보기엔 그의 작품들에 무엇인가가 빠져 있었어. 이상이 빠져 있었다고 하면 될 거야. (...) 그 후로 그의 작품은 볼품없는 화법과 좋은 의도의 기묘한 결합, 영국 회화의 대표 작가라는 호칭을 붙여 주게 하는 작품 뿐이었어."

시빌 베인을 가혹하게 버린 것, 그리고 그 후에 도리언 그레이가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생각한 그 밤, 그래도 아직까지 돌이킬 수 있었던 마지막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헨리 경이 먼저 찾아와 그의 화술로 도리언 그레이를 농락해, 사람의 죽음마저도 쾌락에 삼켜져 버리도록 그를 이끌었을 때, 그는 이미 헨리의 진영으로 끌려들어가 다시는 그 초상화에 자애와 미덕이 드러나는 일이 없는 세계로 빠져 버렸어요.
그 후로는 천사와 같은 얼굴을 한 인간말종으로 떨어져, 기어코 살인까지 하고 맙니다. 그러나 살인에 대한 죄악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은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초상화가 더러워질 것을 슬퍼하는, 자신만을 위한 슬픔 뿐.

숨막히도록 재미있게 읽었어요. 변해가는 도리언 그레이도 도리언이었지만, 그보단 저 헨리 경의 철저히 귀족다운 썩어빠진 정신세계에 이를 빡빡 갈았지요...당장 재미있고 흥미롭고, 자신에게 유익해 보이는 한탕주의. 유미주의의 극치라고 해서 걱정했는데, 헨리 경이었나요.





고백 - 8점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비채


누군가의 입장에서 쓰인 글은 자연스럽게 그 자신과 그 자신의 동료, 혹은 그가 좋다고 생각한 사고관 등을 호의적으로 쓰게 마련입니다. 1인칭이 아니어도 마찬가지인데, 1인칭이면 또 얼마나 그렇겠어요.
그래서 선생님의 고백에 뒤이어 살인자 두 명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그 아이들 중 하나인 와타나베를 돕는 반장 미즈키의 이야기가 각각 진행될 때는, 처음엔 와, 이 나쁜 놈들이...하면서 보기 시작했어도 어느덧 조금이나마 호의는 품었거든요.
그런데 다른 사람이 보는 이야기 속에서는, 자기 자신의 이야기 때에는 밝히지 않았던, 혹은 눈치조차 채지 않으려 했던 '광기'와 '끔찍한 자기애'가 경멸스러운 어조로 드러납니다. 또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도 그런 광기를 눈치채고 억지로 자신을 변호하기도 합니다.
인물에게 품는 작은 호의마저도 산산조각 내는 이 무시무시한 소설이라니….





어느 미친 사내의 고백 - 6점
존 카첸바크 지음, 이원경 옮김/비채


...어쩌면 그 작은 사내는 우리와 함께 이 미치광이 창고에 버려지자 단지 삶의 의미를 찾고 싶어서 그런 망상에 사로잡혔는지도 모른다.
정신병자인 우리 모두가 그랬다. 우리의 가장 큰 소망과 꿈은 중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목표를 이룰 방법이 암담해서 괴로웠고, 결국 망상으로 그 자리를 메웠다. 내가 살던 층만 해도 예수가 여섯 명, 혹은 하느님과 대화할 수 있다고 우기는 자들, 매일 세 번씩 메카를 향해 무릎 꿇고 기도하지만 방향이 자주 틀리는 무하마드 한 명, 조지 워싱턴 두 명을 비롯해 링컨과 제퍼슨부터 LBJ(제36대 미국 대통령 린든 리처드 닉슨의 별명)까지 다채로운 대통령들, 그리고 사실은 해롭지 않지만 이따금 남을 위협하면서 사탄의 징조 따위를 감시하는 꺽다리 같은 자들이 살고 있었다.
어느 미친 사내의 고백, 존 카첸바크, 비채, p76


주인공 프랜시스는 소위 말하는 정신병자로, 현실과 딱 맞는 정신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내부에서 팝콘처럼 튀는 목소리들, 또 가끔은 혼란스러운 환상을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신의 하는 행동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보통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회에서 약간 어긋난 형태를 지니고 있을 뿐. 특히 소방수의 침착하고 어른스러운 태도를 보면서 프랜시스는 정상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회와 '맞추는' 방법조차 깨달아가는 듯 보입니다. 연쇄살인 범인을 잡기 위해 환자의 신분, 특히 정신병자에게 가하는 가혹하리만큼의 제재 아래에서 동분서주하는 둘의 모습은 형사물의 버디 같기도 했구요.

그러나 이것은 프랜시스가 '회상'하고 있는 이야기. 연쇄살인범을 쫓았던 회상을 벽에 적어가며 점차 프랜시스는 광기에 빠져들어갑니다. 자신의 세계에 다시 침잠해 들어가버리고 환상이 빈번하게 나타난 나머지, 그 후 끝의 이야기는 과연 현실인지 프랜시스의 환상인지조차 모호합니다.
개인적으론 지나치게 작위적인 해피엔딩이라 프랜시스의 환상이 아니었나 싶어요.

섬세하리만큼의 심리 묘사엔 탄복할 수밖에 없지만, 검사가 합류하기까지가 지루하리만큼 긴 게 흠이고, 그 길었던 장정과는 반대로 살인범을 잡는 순간은 짧고 너무 빨리 끝나버리는 게 아쉬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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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쪼히 2011/12/08 00:18 # 답글

    솔라리스와 세상이 끝날 때까지 100억년 꼭 읽어보고 싶어요. 러시아 특유의 사변적인 경향은 어렵지만 정말 매력적인것같아요!!
  • 파김치 2011/12/08 12:13 #

    쪼히님, 진짜 재미있어요! '세상이 끝날 때까지 10억년'은 더더더더 일상적으로, SF라면 흔히 상상하는 우주나, 우주선이나, 뭐 그런 게 하나도 나오지 않았는데도 아, SF 장르엔 이런 소설도 나올 수 있어!!! 라고 소리높여 자랑하고 싶은 기분!ㅎㅎ
  • 아루아루 2011/12/08 10:38 # 답글

    저도 아 오스카 와일드! 라는 말이 나오더라구요.
    책이 두께감도 있어서 좀 읽기 오래 걸리겠구나 싶었는데, 완전 몰입하게 만드는 스토리였어요!
    예술에 대한 오스카 와일드의 견해라든지, 인간성에 대한 언급이라든지
    좋은 문장들도 많았구요. 하아 정말 좋았어요
  • 파김치 2011/12/08 12:17 #

    아루아루님, 그전에 고전에서 하도 재미없어서, 고전은 21세기의 나에겐 정말 안 맞는구나..했었는데,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제대로 꽝!! 맞았어요. 이래서 고전이구나! 하고요.
    소설이 묵직해서 읽고 나서도 한동안 헤어나오질 못했어요. 아 오스카 와일드!ㅠㅠㅠㅠ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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