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통에 쌀을 채우고 보니, 흰 쌀밥만 먹는 게 안 좋다며 엄마가 챙겨준 잡곡들이 생각났다.
별 생각없이 봉지를 잡았다. 원래 차조만 들어있는 건데 엄마가 이것저것 다양하게 사서 섞은 듯, 봉지의 입구가 잘려있고 지퍼만 닫혀있는 거였다. 이건 나중에나 생각해볼 수 있었고, 그 땐 그냥 잡곡이 다 들어있는 건 줄 알았음.
지퍼를 뜯어보니 맨 위에 까만 콩이 반줌 정도가 보였다.
아오 콩밥 시른데-_-
까만 콩 완전 시른데-_-;
바로 골라낼까 하다가, 몇달을 먹는 쌀통 하나에 채우는 건데 이 수많은 쌀에 섞이면 어쩌다 재수 없는 날이나 콩이 하나 씹히겠거니 그런 생각이 드는 거다.
어쩌다라면 한두 개 정도는 먹어줄 수 있다는 어른의 이해심을 발휘해서 그냥 흰쌀 위로 모두 냅다 부어버렸다.
그랬더니

?!
눈앞에 왜 콩밭이 펼쳐지는거?
왜 콩이 이렇게 많아?
왜 난 차조를 쏟았는데 콩이 쏟아졌어?
왜 콩이 이렇게 많아?
왜 난 차조를 쏟았는데 콩이 쏟아졌어?

시러시러 콩밥 안 먹어ㅠㅠㅠㅠㅠㅠㅠ
다른 건 몰라도 콩은 우리 집에서 키운 거임.ㅇㅇㅇ…
햇쌀이고 뭐고 햇콩도 나오는 그 가을… 흐규흐규… 보나마나 할머니가 심어서 딴 건데 하지만 난 콩이 먹기 시렁 하지만 이젠 우리가 가서 돕지도 못하는 거 할머니 혼자 했을 텐데 그래도 콩은 콩일 뿐이야 콩콩콩 망할 콩콩1!!!ㅠㅠㅠㅠㅠㅠㅠ
잠시 자아분열했지만 역시 콩밥은 안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집에 있는 채라고는 조 정도나 빠져나올 크기의 작은 거 하나.
어쩌겠어, 골라내야지. 하나하나-_-;;;;;;;;;;;;;
그리하여 딱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콩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손으로 콩 쥐고 옮기는 단순하고 기계적인 반복을 하고 있다보니까, 내가 지금 뭘하는 건지 그런 생각도 들고, 진짜 넘 콩쥐 생각나서 왈칵했다.
콩쥐 및 신데렐라 스토리에서 계모들이 항상 그러잖아.
한 가마니를 주고 "시간 내로 콩을 골라내라. 그걸 다 하고 조것도 다 하고 그러고도 시간이 남는다면 잔치에 데려가주지." 이러면서 시키는 거.
나는 그나마 콩밥을 먹지 않겠다는 그 일념으로 하고 있지만, 콩쥐는 그걸 하면서 뭔 생각을 했겠어.
그러고보니 그거 읽을 때 말도 안되고 쓸데없는 일을 시킨다고 생각했는데 규모는 작아도 내가 지금 말도 안되고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네.-_-;;;;
게다가 이게 시간도 존나 오래 걸리는 건 물론이고, 해도해도 표가 안난다.
콩 담은 봉지는 불룩해져 오는데 쌀통 안의 콩은 마치 그대로인듯. 어디 화수분인가.
구역을 나눠서 해보려고 해도 쌀이 잘잘하니까 제대로 산을 이루질 못해서 계속 무너지니까, 어디를 깨끗하게 정리한 건지 안 한 건지 구별도 안 가고 계속 콩은 분열하는 것 같구….
그러다보니까 또 왈칵.
콩쥐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고생 많았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 진짜 왜 전세계적으로 계모들이 의붓딸 괴롭힐 때 곡물 골라내는 일을 시켰는지 알 것 같다ㅠㅠㅠㅠㅠㅠ
시간은 드럽게 많이 걸리고, 수고는 표가 안나고, 안한 건 귀신같이 보이고ㅠㅠㅠㅠㅠ
근데 생각해보니 의붓딸들이 이걸 끝까지 다 한 경우는… 없지 않나?
뭔 새들이 날아와서 다 했던 것 같은데.

여하간 승리의_노콩잡곡쌀.jpg

골라낸 콩 양 봐라
어떻게 이런 콩을 나한테 먹이려고 하는 수가 있어!ㅠㅠㅠㅠㅠㅠㅠ
반이 넘게 콩이어써, 콩!
엄마에게 막 따지고 싶은 마음이 주먹이 되어서 목구멍을 치는데, 하지만 그걸 말해봤자 골라내지 말고 콩밥이나 먹으라며 카운터 펀치가 날아올 게 뻔해서 차마 말 못했다.
아오ㅠㅠ억울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덧글
뒤늦게 말씀드려봅니다 ㄷㄷ;;;
그냥 먹다보니 먹어지더군요 ㅋㅋㅋㅋ
참! 꾸준히먹으면 머리 굵어져요! 머리카락! ㅎㅎ
머리카락은 지금도 넘 굵고....지금은 굵어도 나중엔 얇아진다고 해서 걱정이긴 한데, 딱 중간 정도면 좋겠어요ㅠ
아... 보기만 해도 아찔해지는 광경이었어요, 저걸 다 골라내다니!!
콩쥐보다 위대하십니다ㅠㅠ 저라면 현기증 나서 끝까지 못했을 거예요ㅠㅠㅠㅠ
근데 단순반복작업을 하는데 마음이 맑아지기는커녕 더러워졌어요ㅠㅠㅠ
확실히 콩쥐..잘 생각해 보면 어려운 과제 스스로 했던 거 하나도 없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