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안의 삶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오스카 와일드 └밑줄 긋기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 10점
오스카 와일드 지음, 이선주 옮김/황금가지




우리의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걸 느낄 수 있었네. 이상한 공포감이 나를 휩쌌지. 그 존재만으로도 그토록 매혹적이어서, 만일 내가 허용하기만 한다면 나의 본성을, 나의 영혼을, 나의 예술 자체를 다 빨아들일 어떤 사람과 얼굴을 맞대고 있다는 것을 알았네. 나는 다른 사람이 내 삶에 영항을 끼치는 것을 이제 원하지 않아. 내 천성이 독립적이라는 건, 해리, 자네도 알 거야. 나는 모든 걸 내가 결정했고 모든 행동은 나의 의지였어. 언제나 그랬지. 그런데 그건 도리언 그레이를 만나기 전까지였던 거야. 그러다가……, 하지만 이것을 자네한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 내가 내 삶에서 어떤 끔찍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무언가가 말하는 것 같았네. 나는, 운명이 나를 위해 지극한 즐거움과 지극한 슬픔, 둘 다를 마련해 두고 있다는 기이한 느낌이 들었네. 나는 점점 두려워졌고, 그래서 그 방을 나서려고 몸을 돌렸네. 내가 그렇게 하도록 한 것은 양심이 아니었네. 일종의 비겁함이었지. 도피하려고 했으니 내세울 만한 짓을 한 건 아냐.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오스카 와일드, 황금가지, p19



"(...)어쨌든 나는 자네가 먼저 물러설 것이라고 생각해. 어느 날 자네의 친구를 보며 그가 어딘가 그림에서 나온 듯이 보일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그의 안색에 어린 어떤 색조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고, 그런 것일세. 자네는 진심을 다하여 그를 쓰라리게 책망할 것이고 그가 자네에게 아주 몹쓸 짓을 했다고 진지하게 생각할 거야. 그리고 그가 자네를 방문하면, 자네는 극히 차갑고 무관심한 모습이겠지. 그건 아주 서글픈 일이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자네가 바뀔 테니까. 자네가 나에게 말한 것은 상당한 로맨스야. 어쩌면 예술의 로맨스라고 부를 수 있겠지. 그 어떤 종류의 것이든 로맨스에 빠졌을 때 가장 나쁜 것은, 그것이 로맨스에 빠진 사람을 그처럼 로맨틱하지 않게 만든다는 거지."
"해리,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게. 내가 살아있는 한 도리언 그레이라는 인물은 나를 지배할 걸세. 자네는 내가 느끼는 것을 느낄 수 없어. 자네는 너무 자주 변하니까."
"오, 친구여, 그게 바로 내가 정확히 그걸 느낄 수 있는 이유일세. 한눈팔지 않는 사람들은 사랑의 사소한 측면만을 알지. 한눈파는 사람이야말로 사랑의 비극을 알 수 있다네."
p27



도리언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합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헨리부인. 전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은, 아니 최소한 좋은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은 말을 하지 않아요. 그러나 나쁜 음악이라면, 대화 속에 그 음악을 묻어 버리는 게 우리의 의무겠지요."
"아! 그건 해리의 생각이에요. 안 그런가요, 그레이 씨? 전 항상 해리의 생각을 그의 친구들에게서 듣곤 합니다. 해리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게 되는 게 항상 그렇게 해서지요. (...)"
P73



"해리, 자네가 한 말의 단 한마디도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지. 그 사실을 자네도 알아. 도리언 그레이의 삶이 파멸한다면 그 누구보다 유감스러워할 사람은 바로 자네야. 자네는 겉으로 그런 척하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사람이니까."
헨리 경은 웃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여기길 즐기는 이유는, 우리 자신을 생각할 때 두렵기 때문일세. 낙천주의의 근거는 절절한 공포감이야. 우리가 인간의 본성이 관대하다고 믿는 건, 이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미덕을 소유했다고 믿고 싶기 때문이야. 잔액보다 큰 액수를 인출할지도 모를 때 우리는 은행 직원을 칭찬하고, 혹시 나는 털지 않겠지 하는 희망에 노상 강도에게 서도 좋은 면을 찾아낸다네. 내가 했던 말은 모두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네. 나는 낙천주의를 그 이상 경멸할 수 없어.
p115~116



격정에 휩싸여 흐느끼느라 그녀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녀는 상처 입은 짐승처럼 바닥에 엎드렸고, 아름다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는 도리언 그레이의 깎은 듯한 입술은 절묘한 경멸로 비틀렸다. 우리가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된 사람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감정에는 언제나 우스꽝스러운 무엇인가가 있는 법이다. 그에게 시빌 베인은 어리석은 신파극을 연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눈물과 흐느낌은 그를 짜증나게 했다.
P133



"(...) 그리고 오늘 밤 저는 당신과 저녁 식사를 하고 오페라 극장에 가고, 또 공연을 보고 나서는 어디 다른 곳으로 가서 요기를 하겠지요. 인생은 얼마나 놀랍도록 극적입니까! 이 모든 일들을 책에서 읽었더라면, 해리, 나는 읽으면서 흐느꼈을 겁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이 실제로 일어나니까, 그것도 내게 일어나니까 눈물을 흘리기에는 너무 기이한 일로 여겨집니다.(...)"
P148



사회라는 것, 최소한 문명사회라는 곳은 부유하며 동시에 매력적인 사람들을 향한 추문을 결코 믿지 않으려 한다. 문명사회는 도덕보다 더 중요한 게 매너라고 본능적으로 느끼며 가장 고상한 윤리와 도덕을 갖추는 것보다는 빼어난 요리사를 데리고 있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여긴다. 형편없는 만찬을 대접했다가, 또는 형편없는 포도주를 내놓았다가, 그래도 그 사람이 사생활에 오점 하나 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 건 어쨌거나 별 위안이 되지 않는다. 이 주제를 놓고 벌어졌던 토론에서 헨리 경이 한때 했던 말대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미덕이라 해도 그것이 반쯤 식은 앙트래가 끼친 해악을 보상할 수는 없다. (...) 진실치 못함이라는 것이 그토록 끔찍한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진실치 못한 태도는, 우리가 그것에 기대어 우리의 인격을 여러 개의 것으로 창조할 수 있는 수단이다.
어쨌거나 바로 저것이 도리언 그레이의 생각이었다. 인간의 자아를 단순한 무엇, 영원하고 변함없으며 단 하나의 본질을 갖고 있는 무엇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천박한 심리학에 도리언 그레이는 경이로움을 느끼곤 했다. 그에게 인간이란 수많은 삶과 수많은 감각, 복잡한 여러 개의 형태를 가진 존재, 그 안에 여러 기이한 생각과 열정의 유산을 지니고 있으며, 그 육체부터가 죽음이 거느리는 괴물 같은 질병의 오점과 떼어내 생각할 수 없는 존재였다.
P206~207



무고한 사람이 피를 흘리며 죽어야 했다. 무엇이 그 죽음을 보상할 수 있는가? 아! 보상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속죄는 불가능하더라도 망각은 가능했고, 그리고 그는 잊어버릴 작정이었다.
P264



실제의 삶은 혼돈이건만, 상상의 세계엔 끔찍하도록 논리적인 뭔가가 있었다.
P285




덧글

  • 쪼히 2012/03/22 20:55 # 답글

    파김치님의 도리그레 사랑을보면 얼른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파김치 2012/03/23 13:56 #

    쪼히님, 후후후 어서 읽어보셔요! 완전 소중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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