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안의 삶



책장에서 두 권 읽었습니다


상호대차로 이용하던 도서관이 문을 잠시 재개장을 앞두고 유월까지 문을 닫는다. 나라는 사람은 간사해서 예전에 상호대차 서비스를 몰랐을 때는 잘도 중앙 도서관까지 갔었지만, 걸어서 1분 이내의 작은 도서관으로 책을 이동해 빌려보는 법을 알게 된 후로는 다시는 중앙 도서관까지 못 가게 됐다. 역에서도 상호대차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됐는데, 그것조차도 코 앞 1분과 역까지의 10분을 비교해보면…….
그래서 이걸 핑계삼아 잠깐동안 도서관에서 새로운 책을 읽는 것은 잠시 중단하고, 다시 읽어보는 우리집 책들.
특히 이제 이번만 읽고 팔든지 주든지 해야겠다고 생각한 책들.


바람의 열두 방향 - 4점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용준 옮김/시공사

어슐러 K. 르 귄이라면 'SF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면, 1순위는 어슐러 K. 르 귄'일 정도로 문학성도 깊고, 생각이 들끓는다는 리뷰도 있고… 근데 결정적으로 난 재미가 없었다.
이 단편집 내에서 제일 재미있었고, 또 어슐러 르 귄이 서문(?)에서 쓴 것처럼 제일 SF다웠던 '아홉 생명'은 내가 가지고 있는 다른 SF 단편집에도 실려 있다. 인상적이긴 했지만 그다지 소설로의 재미는 없는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역시 다른 단편집에 있는 내용.
'파리의 4월'은 재미있었지만 내가 왜 어슐러 르 귄의 소설에 크게 매력을 느끼지 못했는지 알 것 같았던 단편이었다. 분명 건드리는 방향은 음습하고 우울한데, 엔딩에선 오직 호의밖에 남지 않기 때문에. 이를테면 크게 반전이 없다고도 할 수 있겠는데, 반전이라고 하면 그거다. 처음부터 깔리는 그 섬세하면서도 축축한 분위기 때문에 끝 역시 그렇게 축축하고 인간성에 대해 재발견(!) 따위는 없이 그대로 나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뽀송뽀송하게 말라버렸기 때문이다.
'이름의 법칙'도 꽤 좋았지만 이야기 자체라기보다 세계관에 더 관심이 가서였다. 딱히 이 이야기에 대해 미련이 생기진 않음. 같은 세계관으로 '땅바다' 이야기가 있다는데, 오히려 그 쪽을 좀 더 알아보고 싶다. 장편이거나 혹은 연작이었다면 관심이 갈 것 같다.
'겨울의 왕'은 내가 역시 가지고 있는 소설인 「어둠의 왼손」의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고 해서 눈여겨 봤는데, 좋았다. 딱히 페미니스트적인 이야기는 아니지만 확실히 <왕>이라거나 <시종>등이 나타날 때 무심코 남자로 생각하고, 특히 주인공일 때 남자로 생각한다. 이 단편의 다른 주인공들에 대해 생각할 때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단편의 주인공은 게센 인, 달이 떠오를 때마다 성별을 선택할 수 있는 양성인이다. 이 개정판에서 남성형 명칭을 모두 여성형으로 바꾸었는데, 몇 가지 특정한 남성 칭호들, 왕이라든가 주군이라든가 하는 단어는 남겨두었기 때문에 야릇한 기분이 든다. 영어에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한국어에서는 딱히 그 칭호가 남성형 명칭도 아니니까 물론 틀리지 않았고, 평소에 <여의사>라거나 <여판사>처럼 직업군 앞에 '여~'를 붙이는 일을 싫어했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어에서는 환영해야 할 일인데도.
아무튼 이야기 자체도 흥미진진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편.

언급한 네 가지 외에는 글쎄.
한 번 정도 인상 깊게 읽어본 후에는 그냥 넘어가도 괜찮다. 대개 그래서 뭐…? 정도다. 잘 정돈되어 있고 세계도 각각 확실히 있는데… 짧다. 단편으로만 가질 수 있는 재미라고는 별로 느껴지지 않는 무상하고 가벼운 꽃바람 정도의 이야기다. 그저 거대한 세계의 일부분을 본 듯, 바람은 어떻게 불어요? 라는 질문에 이어지는 대답처럼 기승전결도 딱히 없고 설명조와 묘사가 대부분.
오히려 SF든 판타지든 각각의 세계를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따로 구상하면서 그 안에서 한결같이 인간, 그것도 남성 여성을 가리지 않고 오직 인간을 그리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작가에 대한 궁금증이지 딱히 이 단편집에 대한 인상적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별로임.



멋진 징조들 - 6점
테리 프래쳇.닐 게이먼 지음, 이수현 옮김/시공사

물론 재미있었다. 재치있었고.
천사와 악마가 힘을 합쳐(…) 아마겟돈 막는 이야기다. 여기까지만 해도 딱 감이 올 정도인데.
근데 두고두고 읽을 만큼 재미는 없다. 한번쯤 생각나면 미소 짓는 걸로 땡이다. 웃을 포인트는 찾을 수 있지만 진짜로 빵 터지냐고 하면 그것도 아닌 것이….
그리스 로마 신화를 모를 수 없을 정도로 그 신화를 모티브로, 혹은 그 신화 자체가 이야기가 되어서 영화며 책이며 여기저기서 나오는 것처럼, 믿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성경 이야기는 몇 개 정도, 특히 묵시록이나 창세기 정도는 흔히 패러디된다.
여기서도 역시 마찬가진데 그러니까 문제는 알긴 알지만 뼈에 절여질 정도까진 모른다는 거다. 한 번에 딱~ 와닿으면서 퐝퐝 터지기엔 문화권이 달라요 요녀석들아. 책이 전부가 블랙 코미디가 아니라 블랙 코미디를 가장한 몸개그이긴 한데, 또 이게 100% 몸개그라고 보기엔 블랙 코미디야. 블랙 코미디에 환장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잉글랜드 개그 센스는 물론 진짜, 정말로, 잘 모르겠다. 내가 읽었던 잉글랜드 소설 내의 개그는 죄다 사이코야. 물론 이것도 사이코다.

아지라파엘은 비참한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꼭 알아야겠다면…… 줘버렸어."
크롤리는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천사는 어지러운 마음으로 양손을 비비며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어. 둘 다 불쌍하게도 너무 추워 보인데다가 그녀는 벌써 아이를 배고 있었고, 바깥에 있는 고약한 동물들이며 다가오고 있는 폭풍을 생각하니까 말이야. 뭐, 나쁠 게 있겠느냐 싶어서 그냥 말해버린 거야. '봐요, 당신들이 돌아온다면 어마어마한 소동이 일어나겠지만, 이 칼이 필요하다면 가져가세요. 나한텐 고마워할 것 없어요. 모두에게 선행을 베풀고 이곳에서 당신들 위로 태양이 떨어지게만 하지 말아요'라고."
그는 크롤리에게 걱정스러운 듯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잘한 것이겠지?"
"자네가 나쁜 일을 한다는 게 가능하기나 한 건지 모르겠군."
크롤리는 냉소적으로 대꾸했지만, 아지라파엘은 그것이 비꼬는 말임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 오후 내내 그 일 때문에 얼마나 걱정했다고."
멋진 징조들, 테리 프래쳇·닐 게이먼, 시공사, p13~14


읽을 땐 그래 이 정도면 내 책장에 남아있어도 조타, 그렇게 생각하는데 안 읽을 땐 저게 뭐야… 이런 얘가 왜 내 책장에 자리잡고 있어(←그것도 하드커버로) 막 이런 거란 말이에요.

덧글

  • 엘민 2012/04/10 18:34 # 답글

    저도 르귄 여사의 팬이지만, 바람의 열 두 방향은 좀 그저 그랬어요...
  • 파김치 2012/04/11 18:12 #

    엘민님, 그렇군요! 다행이다. 이것하고 어둠의 왼손만 읽어보고 실망하는 건 싫었어요~
  • 여람 2012/04/12 12:40 # 답글

    두 권 다 제 책장에서 있어서 쏘 핫...(의미불명)
  • 파김치 2012/04/12 12:52 #

    여람님, 으항항항! 둘다 있으셨군요! 뭔가 미묘한 기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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